2015-02-23

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독립 투사

무타구치 렌야  牟田口廉也 1888.10.07~1966.08.02

일본 제국 무타구치 렌야 중장. ☆☆☆

대한독립을 10년을 앞당겼다고 평가되는 일본의 장군.

한국인들 사이에선 최고의 독립투사로 추앙 받고있음.


" 전쟁에 보급이 왜 필요합니까? " 반자이 돌격의 창시자.


도조 히데키의 백을 등에 업고 낙하산으로 지휘관으로 발탁!



업적 1.

부대장으로 있던시절 부하 병사들이 화장실에 다녀온 뒤 한명의 인원수가 모자라자

"중국인의 소행이다"

이는 중일전쟁의 신호탄이 된다.

밤중에 휘하 병사 하나가 똥싸느라 화장실에 가서 인원수가 안맞자 중국군에 협조를 요청해 병사를 찾음. 그러던 도중 독단으로 중국군에 대한 공격 허가명령을 내려서, 나중에 이걸 빌미로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그때 그는 전쟁을 일으킬 권한이 없는 일개 부대장. (월권행위였냐)

정작 렌야는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며, 나중에 작전회의 당시  다치지도 않은 팔에 붕대를 감고 등장하여서 부상당한 척 하였다.





업적 2.


일명 징키스칸 작전

"포탄은 자동차 대신 우마차로 옮기고 보급이 끝나면 필요없어진

라는 (전쟁역사상) 희대의 명언과 함께 보급 작전 실행.

하지만 소와 말에게 사료를 주지 않아서 이동중 소와 말이 대부분 폐사.

강으로 이동중 말들은 강에 떠내려가고 산으로 이동중 소들은 절벽에서 떨어짐.

육로를 통한 단순 보급임무였으나 실패 → 일본군 물자부족 대 참패.






업적 3.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 쓰냐?"

영국군은 정글에서 비행기에 물자를 투하시켜 보급하는데 사용.

렌야 중장의 한마디로 비행기를 사용하지 못한 일본군은 보급 부족으로 대 참패.






업적 4.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이동 도중 절반은 굶어 죽고, 남은 병력의 절반은 연합군에 투항함.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







업적 5.



렌야 독립투사의 최대업적.

전쟁 역사상 손가락에 꼽히는 임팔 전투의 사령관.

일본군은 "아라칸 정글(A.K.A 헬게이트)"을 뚫고 진격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15일간의 보급물자면 충분하다"며 의지를 불태웠으나 모든 일본 장군이 말림.

하지만 렌야 장군은 뜻한대로 작전을 감행

아라칸 정글에서 일본군의 임무는 영국군이 나타나면 주린 배를 잡고 도주하는 일.

또한 식량은 이름 모를 풀과 뱀.

15일간의 보급물자를 가지고 아라칸정글을 빠져나오기 까지 걸린 기간 90일+α.


심지어 정글에서 만난 상대는 오리지날 영국군이 아닌

영국에 고용된 전설의 용병부대 "구르카 전사단(1)"

일본군은 죄다 썰려나가고 뼈도 안남음.

정글 입구에서는 10만대군이었으나 출구로 나온건 1만3천여명.

이중 병神이 아닌사람은 3천명도 안됨.

전쟁역사상 흔히 볼수없는 대 전멸.







업적 6.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 후 일본군의 장성들은 모두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무라구치 렌야"는 연합군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한 이유로 혼자 무죄 석방됨.

실제로는 1944년 12월에 전역하였으나, 1945년에 일본군관학교 교장으로 돌아가 있던 중 종전을 맞았고, 미 군정에 체포되어 싱가폴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후 1948년 3월에 석방되어 도쿄로 돌아와 1966년 8월 2일 죽을때까지 살았다.

게다가 거의 모든 일본군이 자행했던 학살을 무라구치 렌야는 단 한차례도 실행한적이 없음.

무고한 적들에게 학살은 커녕 학대도 하지않으며, 적에게는 따사로운 인품있는 장군이었음.

장군을 역임하며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동안 처치한 적군의 숫자보다

할복시킨 일본 군인의 수가

일본군 병력의 10%(± α)를 싸우기도 전에 아사시킨 것은 물론

그 이상의 일본군을 사지로 밀어넣음.








연합군에서는 연합군 승리의 주역중 한명으로 취급.

한국에선 독립 운동가로 취급.


무타쿠치 렌야




1966년까지 일본에서 잘먹고 잘살았으며



"나는 잘못하지 않았다. 전부 내 부하 탓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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